침묵의 형식으로 걸러진 마음의 풍경
윤 난 지 ㅣ 미술사가
"한 입으로 여러 말 하지 말자… 그 어떤 것 한 가지를 표현하려고 찾아 헤매기 때문에, 그 어떤 것 한 가지 때문에 힘드는 것이 아닌지?" (1990. 노정란) 노정란은 근작에서 그가 찾아 헤맨 그 '어떤 것 한 가지'를 찾아낸 것 같다. 그것은 오직 형태와 색채로만 호소하는 화면이다. 마음의 풍경·청복숭아·청못·날개 등이 그려진 화면이 '황금분할과 색 놀이'라는 순수 형식으로 정리된 것이다. 그는 여러 고백적인 글에서, 영감의 원천은 자연 또는 그것이 확장된 우주공간이며, 그것이 투영되는 곳은 맑고 깨끗한 자신의 영혼이라고 말해 왔다. 그에게 작품은 곧 작가의 마음에 비친 삼라만상을 옮겨 놓은 것이다. 그의 작업은 외부세계와 작가, 그리고 작품이 하나의 줄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 온 모더니즘의 전형인데, 이번 전시작들은 그 결정結晶과 같다. 작가의 심상이 문학적 수사의 그림자를 벗어버린 채 순수 색면으로 걸러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에는 '황금분할' 또는 '색놀이'라는 명칭이 각기 붙어 있지만 결국 모든 작품에서 이 두 어휘의 만남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황금분할이라는 논리적 사고와 색놀이라는 정감의 유희는 서로 반향하고 보충하면서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형태구조와 색채라는 양식 자체가 작품의 내용인 형식주의의 정점에 다다른 것이다.
황금분할은 세계의 모습을 완벽한 미美로 투영하기 위하여 우리 눈에 틀을 지우는 수학적 구조다. 노정란은 이런 구조 안에서 색의 감각을 가지고 유희한다. 여기서 색채들은 뭉치거나 흐르고, 또 겹치기도 하면서 다양한 깊이와 촉감을 만들어 간다. 특히 색과 색이 서로 스며들면서 만나는 지점은, 그가 색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효과로 접근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런 발색의 과정에 색면들은 명쾌하거나 육감적이기도 하고, 우울하고 사색적이기도 한 다양한 표정을 연출해 낸다. 여기서 형태는 색을 요구하고 색은 형태를 만들어 내는데, 그 둘이 만들어 내는 화면은 언어 이전 또는 그것을 넘어선 회화 고유의 영역이다.
노정란은 순수 시각성을 방패 삼아 회화를 문학의 오염에서 지키고자한 근대적 미술 개념의 충실한 계승자다. 그의 추상화면은 사물의 부재를 증명함으로써 화면 밖의 모든 사물을 증거하는 알리바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 사물을 지칭하는, 그리하여 언어를 화면 밖으로 밀어내는 순수 형식은 회화의 마지막 보루이자, 모더니스트의 최후의 무기다. '회화'라는 '한가지'에 매달리는 '화가' 노정란은 그 보루가 위기에 처한 이 시대에 그것을 지키는 외로운, 그러나 신념에 찬 파수꾼이다. 그의 작품은, 그리고 그것이 우리 눈에 선명하게 각인하는 익명의 감각은 그 보루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월간미술, 20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