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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놀이의 거룩한 욕망

유 경 희 ㅣ 미학 · 미술평론

노정란의 근작은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 구성의 의지라는 일관된 특징을 가진다. 즉 기하학적 패턴에 의한 구획선을 황금분할이라는 개념으로 가시화하면서, 색 면의 대비적인 구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녀의 화면은 황금분할에 입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어떤 우연의 힘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즉 그녀의 작품에는 바슐라르가 '상승적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미묘한 에너지가 꿈틀댄다. 그것은 마치 호흡을 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에너지와도 같다.


96년 이전의 작품에는 얼마간 구체적인 대상을 환기하는 형상을 볼 수 있었으나, 근작들에서는 자연의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비정형의 유동적인 구조와 섬광처럼 가로지르는 역동적인 획의 구성이 사라지고, 마치 색면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원색적인 대비와 다이나믹한 구성으로 표현성과 조형성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정란의 회화는 색면을 근간으로 한 구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한편, 그 이전의 유동적이며 표현주의적인 경향은 대폭 줄어들었는데, 이를테면 부정형의 표현주의적 형태가 직선과 곡선이라는 단순한 형태로 환원되면서 자칫 작품의 밀도를 희석시키고 있는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투명한 원색의 사용과 살아 있는 붓 터치, 경계가 불분명한 형태의 외곽선은 얼마간 표현주의적 성향을 담보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하나의 색이라고 느껴지는 내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의 변주가 감추어져 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작가가 누구보다 색채에 대한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기 작품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색채에 대한 천착으로부터 비롯된 미감은 그녀의 작업이 가지는 가장 큰 강점이다. 그녀에게 있어 색은 궁극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색채는 직접 체험이지 개념은 아니다. 색은 우리가 규정할 필요가 있을 때만 개념적인 대상이지 실질적으로는 체험적 대상일 뿐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녀의 색의 조화는 관념적이지 않으며, 그것은 직관적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색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패턴화된 관념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색과 형태에 대한 순수한 지각과 직관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도 자신의 작업을 '색놀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의 색놀이는 마치 거룩한 식욕과 같은 욕망의 분출이 가시화되고 있는데, 이런 색놀이를 통해 원시적 혹은 원초적 욕망을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색놀이가 기하학적 구성과 색채의 조화라는 회화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색채의 사용에 대한 작가만의 철학과 독특한 감식안이 남다른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작업이 작금의 추상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노정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아 보인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 동안 만연해왔던 추상표현주의 혹은 색면 회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들과 어떤 변별성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작가의 작업에 다시 한 번 비약적인 발전이 기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Art in Culture, 2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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