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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경작

오 광 수 ㅣ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 미술평론가

2000년대에 들어와 두 차례에 걸친 개인전에 대한 인상은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의 궤도”(조신 스타켈스)와 아울러 “대범하고 유동적이면서 동시에 신중하고 치밀한”(리타배리) 화면 경영을 보여준 것이었다. 대단히 발랄하면서도 투명한 생명감으로 뒤 덥혀 있었던 색면은 그야말로 폭발할 것 같은 색의 유동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무언가 자연으로부터의 웅장한 계시의 파동을 가감 없이 수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작가는 그 시기의 작품을 <황금 분할>과 <색 놀이>로 명명하고 있다.

그의 최근작은 색 면의 구성에 치우쳤던 <황금분할> 보다는 <색 놀이>의 연장으로 보인다. 그가 사는 동네가 산비탈이기 때문에 눈이 오는 날은 빗자루로 비탈길을 쓸지 않으면 안된다. 밤새 쌓인 눈을 쓸다보면 그 속에 흙과 나무 잎들이 층층이 쌓여있음을 발견한다.

대 빗자루로 쓸다보면 쓸려나간 부분과 아직도 바닥에 남아 있는 잔설과 나무 잎과 흙이 얽힌 미묘한 형상과 쓸려나간 부분에서 빗자루의 고운 결이 떠오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하잘 것 없는 자연의 현상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추적한다. 산다는 것과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한다.

“한 겨울 대나무 비로 쌓인 눈을 쓸어본다. 빗자루의 결, 그 속에 묻어나오는 층층의 흙과 낙엽이 그림을 만든다. 그 그림 속에서 수 십 결의 색을 본다. 색 놀이다. 색을 쓸면서 논다. 쓸기의 결, 세월의 결, 색의 결이 나의 그림이다.”

그의 소박한 일상의 발견과 그것을 통한 작업의 의미는 그가 언젠가 말한 “살아있는 이 우주 생명체의 아주 작은 일부분인 것을 인식 하는”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근작은 종전의 작품에 비해 대단히 심플하다. 평면에 횡으로 가로 지르는 하나 또는 둘 셋의 색 띠가 나타날 뿐이다. 단순한 일획의 쓸기로 마무리되기도 하고 각각 다른 색 띠가 나란히 또는 겹친 형국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쭉쭉 빗자루로 밀어가다 가장 자리에 와서는 마치 눈을 쓸고 빗자루를 땅 바닥에 툭툭 털듯이 단절의 흔적들을 남긴다. 단호하게 밀고 나간 부분과 대조되게 가장자리의 드리핑과 같은 흔적은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아쉬움을 남기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색 띠는 이미 바탕에 깔려 있는 색과 서로 얽히면서 결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바탕과 구분되는 분명한 색채로서 자국을 남긴다.

굵은 빗자루로 대범하게 밀어붙인 색 띠는 하나의 자획처럼 분명한 자기 존재를 현전시키지만 그것들이 쌓여가면서 만드는 결은 깊은 내면의 울림을 동반하면서 화면의 차원을 형성해간다. 눈을 쓸듯이 색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무위의 행위에 비유된다. 눈을 쓸다보면 어느 듯 눈을 치운다는 목적의식이 사라지고 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무위의 즐거움에 젖어들듯이 색을 쓴다는 것도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행위의 반복을 통해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잃고 문득 자연과 일체되는 경지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색채는 활홀한 자기현전에 매몰된 느낌이었다면 근작에서 만나는 색채는 쓸기의 행위 속에 자신을 망각하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순응된 감정을 은밀히 드러내고 있는 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 행위를 논다는 말로 표현한다. 색과 논다고 말이다. 논다는 것은 어떤 전제된 목적을 지니지 안는다. 논다는 자체가 목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놀이의 결과로서 남아나는 색의 결은 농부가 여름 내 밭을 경작하듯이 풍요로운 결실을 예감한 것이다. 무위의 행동에서 생겨나는 미묘한 결에서 세월의 결을 느끼게 하고 그 쌓인 세월의 결속에서 삶의 의미를 가다듬듯이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한다.

​이화익갤러리 전시도록,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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