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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의 조화

리타 베리 ㅣ 미술평론

노정란의 작품은 정확히 어떤 화풍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그의 붓자국은 대범하고 유동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중하고 치밀한 면을 보인다. 그의 색은 밝고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신비스럽고 사색적으로 보인다. 그의 형태들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오래 관찰하면 할수록 더욱더 복합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의 대작들은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인상을 준다.

 

어떤 이는 노정란의 작품들을 표현주의적인 것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 그의 작품이 서양의 표현주의에 대한 상투적인 개념, 소위 “反 義된 표현” 하고는 미묘하게 다른 감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점만 제외하고는. 일부 그들의 생각은 표현주의의 너무 일반적인 정의에 둘러싸인 오해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정의는 남성위주 그리고 서양(주로 독일)적인 고뇌의 개념에 연결되어 있다. 표현주의란 공격, 활력, 폭력 그리고 힘이라는 측면에서 묘사된다. 이러한 “바지 속의 고뇌”의 개념은 여성을 능동적인 개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양자대립의 의식구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양자대립의 구체적인 설명 - 즉 능동과 수동, 주관과 객관, 동질과 이질은 41년전 시몬느 드 보바르에 의해 서양문명의 기초로 인정되어 왔다. 아직도 이 절대적인 대립성의 구체적인 개념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사고를 형성시키는 상징적인 과정을 통하여 오늘까지 지속되어 왔다. 헬렌 씩쑤는 말하기를, “완벽한 상징구조란 서술된 모든 것, 조직된 모든 정의(예술, 종교, 가족, 언어), 우리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과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 - 사회계급 조직의 모든 대립에 바탕을 두어 조직된 모든 것을 말하며,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에 귀찬된다.

 

한 동양여성이 즉 서양과 남성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제3자”라는 존재로서 이러한 서구중심적인 대립론에 근거를 둔 예술언어를 이야기하는 위치에 있을때, 그 언어구성에 있어서 반드시 갈등이 따르게 된다. 노정란의 작품은 동양여성의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그것은 명백한 대립의 조화를 감지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 하듯, “나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찾기 위하여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항상 맑게 일깨어있고 싶다. 내그림 속에서 이 조화를 갈구하면서 일하고 있으며 그 결과에서 음과 양의 조화가 보여지기를 바란다.” 노정란의 작품은 극도로 상징적인 형태로 둘러싼 부정적인 공간을 이용해서 창조해 낸 긴장감과, 균형을 통해서 이 음 ․ 양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감정적으로 충전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방치되어 있기 보다는 연출되어 있다. 그의 이야기 하기를, “인생은 환희로운 아름다움과 흐느끼는 슬픔으로 차 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방황한다.” 노정란씨는 이러한 생의 흐름을 상징하기 위하여 자주 뱀같은 꾸불꾸불한 형태를 그리며,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힘과 감정의 조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여러 화면에 반복되고 있는 청복숭아의 주제는 여성의 생식력을 연상시키며, 그 색감은 기묘힌 짜릿함을 창조해내고 있다. 되풀이 되는 눈물 방울과도 같은 주제는 인간의 이상을 향한 탐구와도 연관되는 한편, 작은 철못들은 인간의 희생을 상징하고 있다. 이 모든 주제들과 상징들은 인간의 이상을 찾는 환희와 아픔을 내포하고 있다.

 

‘80년대 노정란은 “심경”(心景)이라는 제목으로 연작을 만들었다. 그 제목은 거의 모든 작품을 묘사하고 있는 듯한데, 외부의 풍경보다는 내면의 세계를 분명히 논하기 위한 끈임없는 노력에 기인한다고 본다. 수평으로 퍼지는 선들은 물처럼 퍼져나가는 사고의 흐름을 은유한 것이다. 아무튼, 이 모든 화면에 순환되고 있는 리듬의 팽창은 보는 이를 화면의 내부로 끌어들이게 한다.

 

노정란의 작품은 대립을 종합할 뿐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미학적인 전통을 종합하고 있다.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그의 고국인 한국에서 전통적이고 동양적인 미술교육을 받았고(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석사),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서양의 미술교육을 받았다(롱비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미술 석사).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두 다른 전통의 다른 장점을 자연스럽게 융화시키고 있다. 이 작가에 있어서 색은 감정의 굴곡을 창조해 내는데 주된 도구이다. 동양의 개념으로는 색이란 단순히 보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느껴지는 것”이다. 그의 화면은 반짝이는 금분과 은분, 시원한 청색, 깊은 붉은색, 영묘한 녹청색, 진보라색과 밝은 노랑색 등이 진동하듯이 섞이어 있고 음울한 검은색과 대비되며 극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그의 대담한 붓의 움직임은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띠면서도 “자연스럽게 절제된” 동양원리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 작가의 붓을 사용한 격조 높은 작품은 표현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기본 생각을 멀리하게 한다. 할 포스터는, 표현주의를 소위 “반중재된 표현”이라 명칭하면서 자칭 선구자임을 특수층이라고 생각하는 유행에 뒤진 인간들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기초를 둔 과장된 사고라고 주장하면서, 표현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의 오류를 깨뜨렸다.

그는 “표현주의가 비록 근원적, 독창적, 자아내부적을 고집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그의 발자취, 그의 제스츄어, 그의 본신을 결코 앞서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무의식의 충동이거나 혹은 사회적인 기호들이건 간에 이러한 중재된 표현들은 작가를 앞지른다. 즉 작가가 표현해 주기 보다는 그들이 작가에게 발언한다”. 고 결론 짓고 있다.

 

흥미롭게도 노정란의 작품들은 중재되지 않은 영감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항상 자중을 강요하고 있고 기교를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은 그 작가들에게 자발적으로 넘쳐 흘러 우러나오는 창조의식이나 아이와도 같은 자기 본성으로 복귀하게 하기 보다는 고대언어를 설명시키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식시키고 있다.

 

포스터의 이 유명한 논문이 출간된 이후, 표현주의가 정치적으로 오류된 장르로서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가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문으로 인해서 표현주의에 대한 거론을 하는데 쓰여왔던 용어나 개념의 문제성이 진정한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다. 노정란의 작품은 표현주의의 화면이 주의깊고 신중한 과정에서 발단될 수 있으며, 그것은 재창조에서 보다는 대립의 조화를 지향하는 가운데서 여성작가로서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

​선화랑 전시도록,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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