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감정의 표현 : 노정란의 그림
정 병 관 ㅣ 미술평론
골짜기 저 머리 북한산 산봉들이 보이는 세검정. 자연 속에 계절은 오고가며 화가에게 끝없는 영감을 안겨주리라 생각된다. 2년전 엘.에이에서 그린 그림들을 가져와 미문화원에서 보여주었을 때는 무한한 평화와 호사 속에 행복감을 보는 이들에게 안겨주었었다.
현재 세검정 화실에서 그린 그림들은 격렬해지고 조금은 심각하여 계절뿐만 아니라 이 화가의 삶 또한 변화를 가져 온 것이라고 생각게 한다. 그림은 그에게 있어 거울처럼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녹화기 같은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 속에 화가의 실존적인 영상이 흔적을 기록해 나간다는 일이다. 그의 그림은 번쩍이는 직관일뿐 아니라 철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림 속에 자연은 화가의 심정 토로를 위한 핑계이며 나아가서는 초월적인 세계에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 화려한 우울 속에 숨쉬는 색체, 발랄한 활력으로 질주하는 붓자국, 우연적인 얼룩과 투명한 중첩효과, 화면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자장(滋場)처럼 화면구성을 총괄하는 덩어리들. 감이 잡히지 않는 모호한 그러나 신비한 공간, 이 모든 것들은 이 화가의 설명이 불가능한 지혜가 그림을 그리는 각 순간마다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그 솜씨를 발휘하는 데 불과 하다.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되어져 나오는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이 화가의 제작과정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그는 날 때부터 화가로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하며 그림 또한 꾸밈없이 태어나온 것만 같다.
추상적인 풍경화가. 정신적인 풍경화가. 이러한 명칭이 이 화가에게 적합 한 것인지 알수 없다. 그저 화가이면 어떠랴 생각된다. 산과 하늘을 생각게 하는 형상이 있다. 그렇다고 구상 화가라고 말할 수 없다. 구상성이 화가의 자유, 순간 순간에 뛰고 나르는 붓놀림을 구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려진 자유. 그것은 화면공간이 숨쉬는 자유이며 화가의 정신이 숨쉬고 무한 속으로 높이 올라가는 자유이기도 하다.
두손화랑 전시도록,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