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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기(生氣)의 조형적 현현
    이선이 ㅣ 시인, 경희대 교수 1. 현현(epiphany)은 우리가 일상적 삶의 한 순간에 경험하는 영원하고 고귀한 것의 돌연한 출현을 뜻한다. 기독교에서 신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경축일을 뜻하는 이 용어는, 오늘날 예술에서 중요한 미학적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원어 그대로 에피파니로 불리는 현현은, 예술을 통해 비루한 우리 삶을 고양시키는 미적 기법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현현은 미혹한 영혼을 일깨우는 깨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신성을 자각하는 순간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더 크고 존엄한 존재자를 발견하는 숭고의 감정으로 계시되기도 한다. 그 양상이 어떠하든 현현은 왜소하고 불안한 우리 인간이 더 깊고, 더 높고, 더 큰 세계를 향해 스스로를 열도록 도우며, 이 존재의 열림을 통해 우리는 충만한 삶의 기운을 충전하게 된다. 김태수의 조형세계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과 미감은 이러한 현현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이곳으로 초대받은 우리는 어김없이 어떤 돌연한 현현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순간들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어서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우주적 생명감각을 깨우는 발견의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기(生氣)의 조형적 현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강렬한 생명적 에너지에 감전되는 것이다. 전율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미적 체험은, 몸의 느낌(feeling)으로 전해오는 생기의 솟구침이자 생명을 향한 도약이라 할 수 있다. 이 느낌의 진앙지와 그 강도를 묻는 일이야말로 김태수의 조형세계를 해명하는 패스워드가 아닐까 싶다. 2. 작가는 자연과 우주를 관류하는 생명의 기운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생기 커뮤니케이터이다. 마치 말할 수 없는 동물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애니멀 커뮤니케이터처럼, 작가는 자연의 생명적 기운을 자신의 조형언어로 번역해낸다. 실제로 작가는 도시를 떠나 가평의 북한강변 산자락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의 꽃과 바람, 강과 나무, 흙과 구름을 상상의 촉매이자 사유의 집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자연으로부터 작품의 모티프를 발견하고는 있지만, 자연현상 자체를 소재나 주제로 다루며 자연예찬에 몰두하는 작업 스타일과는 일정한 거리를 보이고 있다. 자연의 드러난 현상을 탐색하는 방식과는 달리, 김태수는 현상의 이면에 드리워진 생명의 기운을 형상화하는 데 조형적 감각을 집중한다. 드러난 자연의 질서 이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더 큰 질서를 포착하고,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조형언어에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2009년에 시작된 「Eco Flow」 시리즈에서부터 작가는 이러한 생기전달자로서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뿜어내고 있는데, 작가가 어떻게 자연과 우주의 생기를 포착하고 이를 전달하는지 살피기 위해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중심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미학적 방법을 탐문해 보면 이러하다. 3. 「Nature’s Secret」라는 이번 전시에서 우주적 생기를 구체화하는 조형언어는, ‘품다’와 ‘솟구치다’와 ‘흐르다‘라는 동사적 이미지에 집중되고 있어 이채롭다. 생태감각을 강하게 담아낸 이전의 전시에서도 빈번하게 다루었던, 싹과 꽃, 물결과 바람결이라는 자연심볼은 이번 전시에서도 반복되며 변주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를 보다 단순화하고 추상화함으로써 생태계 내부를 채우고 있는 살려는 의지로서의 생기를 돌올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여기서 특징적인 면은 이러한 기(氣)의 충만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싹이나 꽃 또는 물이나 바람이라는 명사로 포착되기보다는, 품고 솟고 흐르는 동사로 포착된다는 점이다. 동사의 이미지화, 이것은 작가가 우주만물 속에 내재하는 기운생동하는 생명적 에너지와 어떻게 접속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가령 「Calm and Passion」이라는 작품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미적 경험을 따라가 보자. 언뜻 보면 물방울이 창문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땅속에 묻힌 씨앗이 싹을 틔우려고 발아의 기척을 하고 있는 상상에 동참하게 된다. 이 상상은 작품 앞에 선 우리를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순정한 아이의 시간으로 데려다 주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몸에는 어떤 생기가 샘솟기 시작한다. 「Breeze in the Forest」나 「Sweet Whispering」뿐만 아니라, 이 작품들 보다는 구상성이 강화된 「Spring Letter」나 「Perfect Rhythm」이라는 작품 앞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상상의 열림과 떨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감추어진 생명의 기운을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은, 달콤한 속삭임을 담은 부드러운 생기로 표현되기도 하고, 생동하는 환호성을 담은 역동적인 생기로 분출되기도 하며, 때로는 사막에 내린 비에 담긴 고요한 생기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얼마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생명 에너지를 형상화하는 동사적 이미지에 대한 집중은 동일하게 드러난다. 우주적 생명의 기운을 품거나 이러한 기운이 발현되는 솟구침의 이미지는, 씨앗에서부터 싹과 꽃으로 변주되면서 김태수의 조형세계가 생기를 포착하고 전달하는 중요한 미적 방법이 된다. 이와 함께 작가의 조형언어에서 중요한 술어가 되는 동사적 이미지는 ‘흐르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이미지는 변화에 대한 감각을 담아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흐르다’는 그 형상화의 대상이 바람에 국한되지 않으며, 작가의 조형세계의 근원적인 주조음(主調音)이 되고 있다. 바람은 흐르는 물의 형상으로 다가오며, 솟구치는 싹은 대지를 향해 흐르는 물처럼 휘돌면서 솟구친다. 품고 솟는 수직적 이미지에서도 발견되는 이러한 유연한 흐름의 수평적 이미지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가 어디인가를 가만히 말해준다. 이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도(道)에 가깝다는 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도덕경󰡕에서 물의 이미지는 무위자연을 향한 조용한 순응의 이미지라면, 생기전달자로서 작가 김태수가 포착하는 흐름의 이미지는 좀 더 역동적인 변화의 낙폭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우주생기에 대한 감수성은 노장의 세계보다 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세계의 존재상을 변화로 읽어낸 시각은, 동양에서 고전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주역󰡕에서부터 발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작가의 작품에서 바람의 자취나 물결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가 󰡔주역󰡕에서부터 우주적 근원질서로 인식되어 온 ‘변화’를 사유의 거처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생기와 변화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 전체의 내용과 형식으로 공존하고 있고,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형성하는 생명 에너지는 변화를 본바탕으로 삼아 흐르고 있다. 따라서 김태수의 조형언어인 ‘품다’와 ‘솟다’ 또한 ‘흐르다’라는 생기의 흐름을 바탕으로 삼아 그 이미지를 구체화해 나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김태수의 조형세계가 빚어내는 감동의 진앙지는 ‘흐르다’라는 동사적 이미지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흐름의 동사적 이미지는 물질 자체의 본원적 속성인 운동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일층 근원적인 존재의 실상을 환기해낸다. 현대물리학의 주류인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보는 물질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다. 물질이 입자라는 사실에는 쉽게 수긍이 가지만 파동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물질이 파동이라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내부적으로 리드미컬한 운동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원자 차원에서부터 비롯하는 이 운동성을 확대해서 우주적 차원에 적용해 보면, 일종의 우주적 리듬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운동성을 체감해 볼 수 있는 이미지의 하나가 바로 바람이다. 바람은 보이거나 잡히지 않지만 분명한 존재성을 드러내기에, 드러난 질서 이면의 숨겨진 질서를 비유하는 상징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물과 함께 바람은 정지와 단절이 아니라 흐름과 연속이라는 이미지로 종종 포착되는데, 이 바람의 이미지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조형언어가 빚어낸 미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흐름의 이미지가 물질의 내부에 존재하는 파동에서부터 비롯하는 생명의 근원적 율동을 닮았다는 사실은, 지난 이십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작가의 조형세계가 왜 그토록 흐름이라는 동사적 이미지에 집중되어 왔는가를 해명하는 실마리가 된다. 작가의 작업은 원자 단위에서부터 내장하고 있는 생명의 역동적인 파동을 생명기운(vital energy)으로 포착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형상의 결들은, 마치 수면에 파랑을 일게 하는 바람의 흔적이자 매끄러운 물의 표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부드러운 운동감은 생명 일반이 가진 내면의 운동성과 결부되면서 무한의 우주를 향한 생명의 도약을 감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의 발뒤꿈치에 돋아난 날개를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필이면 발뒤꿈치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고립된 인간이 무한의 세계로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물·불·공기·흙의 기본 물질이 어떻게 변형되어, 우리의 의식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가를 여러 예술작품을 통해 읽어냈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공기와 꿈󰡕에서는 날아오르는 꿈의 주인공에 대해 언급하는데, 여기서 그는 우리가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한 힘은 날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 말은 헤르메스의 발뒤꿈치에 달린 날개 이미지를 보면서 가졌던 의문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신화 속 헤르메스의 날개는 발뒤꿈치에 아주 작게 그려진다고 말하며, 우리의 상상은 날개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도약을 통해 비상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헤르메스는 날개달린 모자도 쓰고 다녔지만, 바슐라르는 솟구쳐 오르는 약동과 비상의 이미지를 도약의 힘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김태수가 「생명의 소리」 시리즈와 이를 심화시킨 「Eco Flow」 시리즈,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 있는 이번 「Nature’ Secret」에서 보여주는 운동성은 바로 이 도약과 연결된다. 씨앗을 품고 싹을 틔우며 바람의 흐름을 담아낸 자연심볼들을 통해, 작가는 우주적 생기를 현현하면서 생명이 도약하는 순간을 포착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도약과 비상의 날개는 작가가 걸어온 결코 간단치 않았을 삶의 행로가 만들어낸 선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작가 김태수는 발목 어딘가에 날개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어쩌면 두 발로 살아낸 한 인간이 어떻게 날개를 만들어 왔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시공간에 초대받은 것인지도 모른다.(그러므로 혹시 작가를 만나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녀의 발에서 돋아난 날개를 찾아보시압!) 그 날개 밑에는 자연철학자나 생기치유자들이 그러하듯, 거대한 우주생명의 일원으로서 이 세계에 동참하는 경이로움과 겸허함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 도약을 이끄는 날개는 자연 자체가 품고 있는 신비이지만, 김태수의 조형세계가 갖는 신비이기도 하다.
  • 김태수, 생장과 성숙의 충일함
    서성록 l 미술평론가 부드러운 유선형의 구조물들이 바닥에 뉘어 있기도 공중에 떠있기도 하고, 벽에 걸려 있기도 하다. 조각이지만 작품을 꼭 바닥에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작가는 장소 성을 고려해가며 작품을 적절한 위치에 설치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 형태는 잔잔한 물결, 바람결, 혹은 생명의 프로쎄스를 연상시킨다. 어떤 작품은 물결과 바람결처럼 고요한 선의 흐름을 강조한 것도 있고, 어떤 작품은 과일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어디론가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시간성을 동반하고 있다. 목적지를 알 수 없지만 그가 안내하는 대로 우리의 시선도 저절로 움직인다. 시간은 정지된 공간을 벗어나게 해주는 통로이고 밧줄이다. 그 통로로 발걸음을 떼면 바깥의 청량한 공기를 흠뻑 들이 마실 수 있을 것만 같다. 김 태 수 는 자신의 작품을 <에코 플로우>라고 부른다. 풀어서 얘기하면 ‘생태의 흐름’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작가는 그의 작품제목처럼 생태의 운동 및 자취를 포착한다. 주지하다시피 생태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자연의 기후, 계절, 온도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며 성장한다. 이런 것들을 작가는 ‘선’으로 묘출하고 있으며, 실인즉 그의 작품에서 날렵한 곡선 형태는 어디론가 치닫는다. 즉 성장을 향한 도약과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보일락 말락 극미한 점에서 시작하여 면으로 넓혀지듯이 작은 데서 큰 데로, 응축에서 이완으로, 안주에서 도전으로 뻗어간다. 그는 작업의 재료로서 포맥스와 철, 스테인레스 스틸의 판재를 기용한다. 실내의 간판글씨나 마감재로 사용되는 포맥스는 연질인데다가 내구성이 커서 그의 평면작품재료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잘 휘어지는 성질을 이용하여 연속적인 곡선과 유연한 리듬감을 실어낸다. 물론 이런 용의주도한 조형감각은 능숙한 재료의 다룸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작가는 재료를 레이저로 정교하게 컷팅 하여 매끄러운 곡선을 살려내고 그렇게 컷팅한 판재를 겹쳐서 한 점의 구조물을 탄생시킨다. 물론 정확한 컷팅을 위해서는 사전에 스케치와 모형작업 그리고 컴퓨터 3D작업을 통해 설계도를 꼼꼼히 점검하고 하나하나의 판재에 빈틈이 없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라도 똑같은 게 없으며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통일감을 갖추도록 유의한다. 그의 작품은 시적인 감흥을 동반한다. 곡선의 흐름은 유연한 리듬을 타고 마음상태를 부양시킬 뿐만 아니라 선의 연속성은 보따리를 싸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때의 기분처럼 홀가분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의 작업은 “생명의 첫 순이 나와 커가는 장면”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말을 참고하면 작품이해에 실마리가 풀린다. 그의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작은 형태에서 시작하였다가 부챗살 모양으로 점차 확대돼가는 형국이다. 미미한 존재가 듬직한 존재로 성장하는 프로세스를 형용한 것이다. 첫순 자체에서 생명과 생장이라는 충일한 정서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큰 것의 미덕을 기리는 세상에서 첫 순은 하잖아 보인다. 조그만 싹이 언제나 자랄까 걱정스럽다. 하지만 새 순은 생명과 생장의 가능성을 구현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우리 영혼도 물댄 동산처럼 비옥하게 되고 꽃을 피우며 향기 나는 나무처럼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생태적 프로세스를 단지 외형적인 성장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성장이 있다면 성숙이 있다. 성장이 물질적인 것이라면 성숙은 정신적인 것이다. 물량적 계측을 좋아하는 현대인은 이 비가시적인 부분을 소홀이 여기기 쉬우나 사람에게 더 큰 영향력을 미치며 인품이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성숙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얼마나 영혼이 고매한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온화함, 부드러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호전적인 자세, 무장을 해제하는 능력은 바로 성숙의 정도를 나타내준다. ‘첫 순’이 나무가 되고 잎이 우거져 열매를 맺듯이 <에코 플로우>에서도 점점 주위를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겹겹이 단층이 나 있는 곡선들은 출발지점에는 하나의 선에서 시작하여 초기에는 폭이 좁았다가 점차 넓어지며 물결처럼 그 파장을 주위에 퍼트린다) 무거움이나 자책보다는 마냥 즐겁고 쾌활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긍정 속에서 찬란한 무지개가 뜬다. 자아에 집착하기를 멈추고 타자와의 성숙한 친밀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삶이 선물로 주어졌듯이 자신의 삶을 공동체와 나누려는 원숙의 경지를 표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무리와 억지라는 것이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간다. 물질을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하고 그 낱낱의 물질을 조율의 과정을 거쳐 거대한 질서에 통합시킨다. 아무런 느낌도 없고 활력도 없는 그런 무기체가 아니라 표정을 지니고 성장하는 유기체로서 다가온다. 그렇게 물질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작품의 백미이자 작가의 자랑거리이다. 작가는 물질을 무형의 가치로 전이시킬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자연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덩치와 부피가 커진다. 그럼에 반해 사람은 자람에 따라서 이해력이 넓어지고 도량이 커진다. 자연의 이미지가 우리의 내면과 공명(共鳴)하여 의미의 풍부함을 더해간다.
  • 생명의 파동
    김복기 l 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1. 조각의 역사는 한마디로 ‘재료와의 격투’라 해도 좋다. 조각은 재료의 예술이다. 소재에 의해 작품의 조형이 규정되는 부분이 압도적으로 크다. 그래서 조각은 언제나 재료와 기술의 진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발전해 왔던 게 아닌가. 20세기에 등장했던 새로운 소재야말로 조각의 표현 방식을 일거에 바꿔 놓았다. 오늘의 조각은 돌, 나무, 점토 같은 전통 재료에 더하여 플라스틱이나 시멘트, 철재 등에서부터 가벼운 것, 투명한 것, 부드러운 것에 이르기까지 가히 ‘재료 백태(百態)’의 시대를 맞고 있다. 현대조각은 제작 기법에서도 ‘깎는’ 조각(彫刻)과 ‘붙이는’ 소조(塑造)에 더하여 구성 혹은 집적 같은 전방위의 방법을 수용하고 있다. 중견 여성조각가 김태수의 작품 양식 역시 그 전제는 재료와 기법의 문제다. 재료와 기법의 연금술을 빼놓고 그 작품의 진가를 올바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김태수의 <Eco Flow> 시리즈는 용접조각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판을 재료로 삼은 그 제작 과정은 이렇다. 조각의 기본적인 외형(이를테면 새싹이나 물방울 모양)을 넓은 철판으로 잘라, 그것을 지지체로 삼아 얇은 철판을 종이처럼 구부려 용접한다. 지지체와 철판의 용접 면은 90도 직각을 이루는데, 철판의 높낮이를 달리해 볼륨을 쌓아 간다. 바로 이 90도 직각의 용접 면을 지탱하는 지지체 두 개를 수직으로 세워 좌우동형으로 서로 결합하면 환조의 전체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조각은 형태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정중앙 지지체를 중심으로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룬다. 김태수의 조각은 결과적으로 환조의 형상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그 출발과 과정에는 평면의 감각이 깔려 있다. 김태수의 작품은 판재조각이다. 얇은 판재를 조형의 기본 단위로 삼아 환조를 만들어낸다. 평면의 입체화! 판재의 반복적인 구성, 유연한 곡선, 리드미컬한 율동. 그의 조각은 하나의 물리적 실체일지언정, 표면의 선적(linear)인 구성, 옵티컬한 색면은 우리에게 회화적인 경험을 강력하게 던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김태수의 조각을 감상할 때면, 3차원의 물질적 덩어리에 대한 경험보다 2차원 회화적 경험이 훨씬 앞선다는 얘기다. 평면의 입체화은 커팅, 성형, 용접 등 제작 기법의 괄목할 기술적 성장과 맞물려 있다. 또한 작가의 평면 드로잉과 종이 입체 구성을 정교하게 집약하는 3D 그래픽, 그 3D 그래픽을 평면으로 환원해서 공정 과정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은 컴퓨터의 힘이 크다. 평면을 입체화하고, 입체를 평면화하는 치밀한 조형! 2. 김태수의 <Eco Flow> 시리즈는 다색조각(polychrome)이다. 전통 조각에서 중시했던 볼륨이나 매스 못지않게 빨강, 파랑, 노랑, 연두 등 순도 높은 강렬한 색채가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현대조각사에서 채색이 하나의 흐름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채색조각은 르네상스 이래 재질의 자연색을 ‘날 것’ 그대로 드러냈던 조각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채색이 등장했던 배경 역시 조각 재료와 기법의 확산이라는 큰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 시기부터 플라스틱 같은 색채 소재는 물론이고 페인트나 아크릴, 합성수지로 도장(塗裝)된 산업 완제품을 재료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결국 채색조각은 산업 기술사회의 부산물이라고 해도 좋다. 현대조각이 색채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옵아트, 미니멀아트 등 모더니즘 회화가 치달았던 환원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각이 회화의 진보에 눈을 돌렸다고 해도 좋다. 예를 들어 안서니 카로의 작품은 조각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회화의 경험을 동시에 유도한다. 정면에서 본 그의 조각은 실제 공간 속의 모든 요소를 수직 면 회화의 직립성 속으로 압축한다. 그의 조각은 회화의 평면성을 노리는 ‘공간 드로잉’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조각예술에서 보이는 회화 조형의 수용을 ‘회화주의(pictorialism)’라 설파한 적이 있다. 김태수의 작품이 환조뿐만 아니라 부조로 형식적 폭을 넓혀 간 것은 필연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조각에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고정될 수 있는 2차원 평면으로의 동경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화라는 2차원의 본성은 3차원의 예술과는 달리,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어떤 한 순간에 즉각적 통합적으로 내용을 전달한다. 확실히 그의 부조는 환조에 비해 확고한 ‘정면의 구성’이 돋보인다. ‘조각’이라기보다는 ‘회화’에 더 가깝다. ‘입체’가 아니라 사각의 ‘평면’ 지지체 위에 펼치는 ‘판재 회화’인 것이다. 김태수의 작품은 환조이건 부조이건 색채와 구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의 표피는 전통 회화와는 또 다른 전망(perspective)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표피는 그저 부동의 일루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곡, 그림자와 같은 엄연한 물질적 실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김태수의 작품은 관람자의 동선과 시선의 변화에 따라 색채와 구성의 흐름, 그 조형이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학적 전망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이 회화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회화와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Eco Flow>은 글자 그대로 ‘생태 흐름’이다. ‘Eco'는 ’Ecology'를 말하고 있다. 김태수는 일찍부터 ‘생명’이라는 주제를 작품에 담아 왔다. 생명의 기본 단위인 ‘씨앗’이나 이제 막 발아하는 ‘싹’을 떠올리는 형상을 작품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 작품의 외형은 아직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여전히 형태의 성장이 진행 중인 가변의 형태다. 형태라고 말하기 이전의 형태다.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새로운 형태를 쫒아 흘러가는 순간의 형태다. 그저 씨앗이라고 해도 좋고, 과일이나 잎이라고 해도 좋은 덤덤한 원초의 형상이다. 때로는 대지를 박차고 쏟아 오른 이름 모를 생명체와도 같은 형상이다. 김태수의 조형적 관심은 이 외형의 형태에 그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2차원 회화적 표현, 요컨대 판재의 리드미컬한 구성과 채색 효과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가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Eco’에 더하여 ‘Flow’의 조형미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 ‘Flow’가 ‘Eco’를 더 극적인 상황으로 유도한다. 그 표면은 잔잔한 물결의 파장이나 부드러운 바람 결 같은 선의 흐름으로 점철된다. 마치 생명의 첫 순이 움을 터서 성장해 가는 장면처럼 작은 형태가 부챗살 모양으로 부드러운 파장을 일으킨다. 그 표정은 가시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그저 ‘기(氣)’라고 부를 수 있는 생명의 에너지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작품 중에는 원(곡선)과 삼각형(직선)의 혼융을 통해 자연 형상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사이버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태수의 <Eco Flow>는 단순히 생태, 환경 문제와 같은 좁은 차원의 Eco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Eco Flow>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미시세계에서 출발해서 그 파장이 우주의 거시세계로까지 이어지는 열린 개념이다. 가시적인 생명 현상을 넘어 비가시적인 생명의 암시까지를 저 꿈틀거리는 유기적인 조형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Eco Flow>는 살아 있는 생명의 파동이다.
  • 보색의 색채와 유기적 형태를 통한 놀이성의 발현
    윤진섭 l 미술평론가 1995년 이후 14회의 개인전을 연 중견조각가 김태수가 면밀한 구상과 계획 하에 신작을 발표한다. 표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은 3개의 전시실 전체를 사용하여 최근 2-3년간에 걸쳐 구상하고 제작한 회심의 대작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녀는 본래 부드럽고 서정적인 인체조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채색된 유기체적 추상조각으로 변신한 후, 탄탄하고도 참신한 조형력을 갖춘 현대 조각가로 화단에 각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어느덧 20여 년을 훌쩍 넘긴 이 작가의 전 경력에서 중반부의 완숙기에 도달한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전 역량을 싣는, 중간 결산의 매우 중요한 전기(轉機)가 될 것이다. 김태수에게 있어서 싹, 풀, 나무, 열매와 같은 자연물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현대적 미감이 물씬 풍기는 세련된 형태의 유기체적 추상조각이 본격적으로 발현된 것은 2009년 무렵의 ‘Eco Flow’ 연작에 이르러서이지 않나 생각한다. ‘생태의 풍부한 흐름(몰입)’이라고 번역되는 이 ‘Eco Flow’란 용어는 김태수의 조각을 관류하는 키워드이면서 그의 관심사를 대변해 주는 말이다. 이는 이 작가의 사유가 대지에 뿌리를 둔, 그래서 오늘날 지구촌의 위기가 환경파괴에 기인한다는 깊은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주와 대지의 순환작용에 사유의 뿌리를 두고 흙을 존중하는 생명사상에 관심이 많은 김태수는, 그 생명이 발아할 때의 순간적 형태를 작업의 기초로 삼음으로써 자신의 작업이 이 초유의 지구촌 전체의 이슈와 맞닿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전시장 바닥에 수평을 이루며 전개되는 조각품의 형태(1층 전시실)나 벽에 파상(波狀)의 연속적인 무늬를 그리는 흰 색의 거대한 부조(2층 전시실), 식물의 열매를 연상시키는 크고 작은 환조 작품들(3층 전시실)로 각기 다르게 구성된 전시장 풍경은 무한한 신비와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에 대한 조형적 유비(analogy)라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단아하고 예쁜 색상들의 반복적 조합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모더니즘 추상 조각품으로 간주될 수 있으나, 그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 관람객들은 김태수의 조각에서 표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미의 이면에 숨겨진 중요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 의미 전환의 단서가 되는 것이 바로 ‘생명, 자연, 호흡, 공유, 순리, 존재, 희망’과 같은 단어들이다. 김태수의 작업노트에서 수집한 이 단어들은 작품을 보는 관람객이 작품의 색채와 형태를 접하는 순간, 연상 작용에 의해 감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이다. 이는 곧 작가와 관람객 사이에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부분이거니와, 비록 이해의 측면에서 고난도의 단점을 지닌 추상조각이라고는 해도 그 보편적 미감, 즉 칸트(I. Kant)가 이야기하는 ‘공통감(共通感)’의 측면에서 볼 때는 만인의 즐김이 가능한 것이다. 철판을 기하학적 형태로 잘라 용접한 후 서로 보색 관계를 지닌 색상으로 분채 도장을 한 김태수의 조각은 쾌적한 세련미를 지니고 있어 현대 건축물에 잘 어울리는 장점이 있다. 리드미컬한 곡면의 조합은 원만한 질서 속에서 화합을 낳는 심리적 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싹, 열매, 꽃, 나무, 풀 등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김태수의 조각은 생장의 신비를 조형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순간의 미학’이다. 꽃이 피는 순간, 싹이 동토(凍土)를 힘차게 뚫고 올라오는 순간, 꽃이 피는 순간, 열매가 벌어지는 지고의 순간을 김태수는 조형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유기적인 곡선으로 표현된다. 그것의 모티브는 마치 죽순이 올라오듯 용틀임하는 생장의 순간들이다. 바람처럼 비가시적 자연의 현상에서부터 끊임없이 순환 반복하는 파도의 일렁임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원초적 움직임은 김태수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태수의 작업을 관류하는 ‘놀이적 성격(유희성)’ 이다. 작가는 자연에서 빈 모티브건, 자신의 의식이건 작업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풀어헤치고자 한다.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가 모든 문화와 예술에 내재한 고유의 특징으로 든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의 정신이 김태수의 작업에도 깊숙이 내재해 있다. 단지 조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리듬감이 유발하는 놀이적 특성을 관객들은 공감하게 될 줄 믿는다.
  • 흐르는 생태, 그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
    고충환 l 미술평론 주제 혹은 소재의 측면에서 김태수의 조각이 변화해온 과정을 보면 먼저 인체에서 자연으로, 그리고 재차 인간과 자연 모두를 아우르는 보다 큰 개념인 생태를 주제화하는 것으로 연이어지고 있다. 비록 시기적으로 구별되는 이 주제들은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된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거나, 인간이나 자연 모두 생태환경의 한 부분으로서 포섭되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생태라는 대 주제를 각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자연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경우라 하겠다. 물론 이처럼 생태를 전제로 놓을 경우에 실제로 조각이 제작된 시기를 거꾸로 되짚어 재구성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인간 혹은 인체를 주제로 하던 초기에서부터 이미 그 이면에는 생태에 대한 의식이 뒷받침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고, 뒤늦게 생태 자체가 별개의 주제로서 부각된 경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각각 인간 따로 자연 따로 접근하던 것이 차후에 생태라는 주제 아래 종합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세부적으로 유학(1987-1992)을 전후한 시기에는 주로 사실적인 인체조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후 인체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점차 양식화되고 반쯤은 추상화된 형태로 변화해 가는데, 대략 2002년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 주제의식으로는 주로 삶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확인된다. 단독상의 경우가 내면을 투시하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두셋 사람이 함께 어우러진 형상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주목한 경우로 보인다. 한편으로 자기 내면으로 숨어들면서, 다르게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자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각각 고립된 섬으로서의 자의식과, 관계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대타자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이라는 이중성 내지는 양면성으로 나타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상형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자연소재로 넘어가는데, 곧장 건너뛰지는 않는다. 인체와 자연소재를 이어주는 일종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있는데, 2003년 즈음의 소위 풍경조각의 경향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인체를 위한 배경화면으로서 풍경적인 요소가 들어오게 되고, 풍경이 전통적인 좌대의 의미기능을 대체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조각의 범주영역이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된다. 이후 작업의 성격 여하에 따라서 여전히 좌대가 부수적인 의미기능을 하기도 하고, 아예 좌대가 없는 본격적인 공간설치 내지는 연출이 병행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체에 풍경적인 요소가 결부됨으로써 그 표현영역이 풍경조각으로까지 확장될 뿐만 아니라, 공간설치작업으로 연이어질 수 있는 사실상의 계기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좌대의 의미기능을 재고하게끔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조각은 좌대 이전과 이후로 가름될 정도로 결정적인 부분이 있고, 현대조각의 표현영역이 이처럼 다양해질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전통적인 조각으로부터 좌대가 사라진 탓에 가능해진 일이다. 조각과 공간을 좌대가 매개시켜주던 것에서 조각이 공간과 직접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조각의 생리나 그 존재방식이 바뀐 것이다. 여하튼 이 시기 이후 본격적인 자연소재로 넘어가는데, 이때 작가가 주목한 자연소재 내지는 자연현상이 바로 발아하는 싹이며, 씨앗이 이제 막 싹을 틔워 본격적인 생장을 준비하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자연형상은 대개 이미 생육을 마친 경우이다. 완전히 성숙한 자연을 형상 내지는 구상적인 형태로 기억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씨앗 자체나 더욱이 씨앗이 발아하는 순간은 그 형태가 상대적으로 가변적인데, 아마도 어떻게 생장할지 그 형태를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애매한 성질이 작가로 하여금 적어도 외관상 추상적으로 보이는 형태에 천착하고 심화하고 다변화하게 한다. 보통 추상이라고 하면 순수하게 관념적인 형상을 떠올리기가 쉬운데, 작가의 경우에는 이처럼 자연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끌어낸 추상적 형태란 점에서 분명 다르다. 유기체의 본성을 따른, 일종의 유기적 추상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작가로 하여금 자연의 본성 곧 자연성을 특정의 형태에 가두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을 품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씨앗 자체가 아니라 씨앗을 통해서 사실은 그것이 품고 있는 생명 내지는 생명현상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궁극적인 지향이 씨앗이 아닌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확실해진다. 즉 생명에 정해진 형태가 따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한 모든 형태에 대해 열려 있는 생명현상을 추상적인 문법을 빌려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여기에 씨앗으로 나타난 가시적인 형태 이면의 생명이라는 비가시적인 현상마저 가시적인 표층 위로 밀어 올려 암시할 수가 있다면 작가의 조각에 엿보이는 추상적인 형태, 엄밀하게는 유기적 추상 혹은 유기체적 추상형태가 갖는 당위성은 분명해진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하고 있고, 그 겨냥은 상당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자연소재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2004년 이후부터 적어도 외관상 생태를 주제로 한, 그래서 그 영역과 범주가 단순한 자연소재보다 더 포괄적이게 된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 표상형식(생명의 표상으로서의 발아하는 씨앗)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조각은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는데, 2006년 버몬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 참여한 것이 그 계기가 되어졌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소위 판재조각이 등장하는데, 덩달아 재료도 이전의 브론즈와 석재로부터 나무와 철판, 스테인리스스틸과 아크릴의 일종인 포맥스 소재 등 다양해진다. 처음에는 크고 작은 가공한 목판을 중첩시키거나 배열하는 방법으로 발아하는 씨앗이나 볍씨 그리고 종자 등 자연 모티브를 형상화하다가, 이후 점차 본격적인 판재조각으로 부를 만한 경우로 진화해간다. 철판이나 포맥스 소재를 슬라이스 형태로 자른 후, 그것들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일종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판 위에 휘어서 중첩시켜나가는 방법으로 하나의 전체 형상을 재구성해낸 것이다. 그 형상은 한눈에도 건축적이고 구조적이고 공작성이 강한 편인데, 환조의 전형적인 형식에 천착한 전작과는 뚜렷이 구별돼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조각의 본성으로 치자면 단연 양감, 매스, 덩어리를 꼽을 수가 있다. 인체조각이나 자연소재를 다룬 초기 형태가 이런 매스에 천착한 것이었고, 브론즈와 석재는 그 형태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료가 되어주었다. 그러다가 이처럼 조각의 생리가 환조의 전형적인 형식으로부터 소위 판재조각으로 바뀌면서 재료도 덩달아 바뀐 것이다. 내용이 바뀌면서 형식이 바뀌고, 형식이 바뀌면서 이를 적절하게 표현하게 해줄 재료도 같이 바뀐 경우일 것이다. 좌대가 없는 조각을 통해서 조각의 표현영역을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시킨 이후, 매스가 없는 조각을 통해서 조각의 생리를 재차 확장시킨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색채의 적극적인 사용을 들 수가 있다. 작가는 진작부터 조각에 채색을 도입한 편이었지만, 색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래서 색채가 형태를 돋보이게 해주는 결정적인 요소로서 작용한 것은 아마도 이 작업 이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색채의 도입은 지금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색채에 대해서 인색한 편인 국내 조각계의 현실과 비교된다. 그렇게 비교되면서 오히려 작가의 조각을 더 또렷하게 부각하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빛의 도입 역시 기왕에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된 작가의 조각의 생리를 더 유연하게 가져가는 한편으로, 장소특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공간친화력을 중요한 한 특징으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다. 그리고 작가는 200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생태>를 주제화한다. 주제도 그렇고 어느 정도는 형태 역시 일관성을 보여주면서 심화 내지는 다변화시켜가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형태도 그렇지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다름 아닌 주제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를테면 국내적으로 1980년대 미술계의 화두로 치자면 이념일 것이며, 90년대 들어서는 몸이 될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단연 에코 곧 생태가 시대정신의 열쇠말로서 등장한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작가가 지금여기의 시대정신을 의식하고 있거나 읽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살폈듯 기본적으론 판재조각을 변주하고 있는데, 독립된 조각을 위해서는 주로 철판에 채색한 조각의 경우가 많고, 상대적으로 휨의 정도가 강한 편인 평면작업을 위해서는 포맥스 소재를 사용한다. 평면작업은 벽면에 부착되거나 설치되는 것으로 인해 일종의 그림(일종의 드로잉 조각?)으로 볼 수도 있겠다.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고, 조각과 그림의 범주를 아우르고 있는 것. 흐르는 생태란 주제 속엔 자연의 본성이 들어있고 생명의 본성이 오롯하다. 흐르는 것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것은 그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다. 다만 고정된 한 순간을 포착할 수가 있을 뿐인데, 이때마저 사실은 자연의 본성을 그르치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순간을 붙잡으려면 자연을 정지시켜야하는데, 이때의 정지가 자연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자연을 순간적으로나마 고정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식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그 일로부터 자연은 무감하고 무심하고 무관하다. 어쩌면 흐르는 생태라는 주제로 붙잡은 작가의 작업들은 사실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이를 통해서 암시되는 어떤 경지, 비가시적인 어떤 차원, 이를테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생태환경의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를 보여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구상조각, 그 새로운 지평의 모색
    이영재 l 미술평론가 김태수는 체질적으로 구상적 감각을 지닌 조각가처럼 여겨진다. 그녀의 조각세계를 보면 늘 인체에 대한 깊은 탐구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인체야말로 오랫동안 수많은 조각가 들이 즐겨 다루어 왔던 소재였으면서도 늘 우리들에게 새로움을 환기시켜 주었던 소재이다. 그만큼 인체는 선사시대부터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는 소재였던 것이다.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것은 늘 조각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던져주곤 한다. 김태수의 조각은 지금까지 약간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인체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녀의 젊은 나이를 감안해 볼 때, 인체에 대한 그녀의 특별한 관심은 습작기에 있는 많은 조각가들의 관심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서 오랜 생활을 하면 서도 인체에 대해 더욱 깊어진 관심을 보여 줌으로써, 보다 보편적 시각에서 인체를 접근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가로서 지금까지 김태수의 여정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80년대 중반 그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녀는 미술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면서 약간의 작품을 남겨 놓기는 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본격적인 작가적 의식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 는 작품들은 졸업 이후 얼마 안되어 건 너간 미국에서의 작업들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김태수는 80년대 중반에 그녀의 남편을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인디애나 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그녀는 계속 조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인디애나 대학의 분위기는 구상조각에 대한 관심보다는 실험성이 강한 현대미술, 그리고 미학이나 미술사와 같 은 이론적 관심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구상조각에 뜻을 둔 그녀에게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미술사같은 이론적 분야에 관심을 갖게되기도 하였다. 실험성이 강한 현대미술이 주류를 이루는 분위기 속에서도 인디애나 대학에는 드물기는 하였지만 구상조각에 관심이 많은 조각가였다. 가령 쟝 폴 다리오(Jean Paul Dariau)같은 교수는 구상조각에 관심이 많은 조각가였다. 그녀는 쟝 폴 다리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쟝 폴 다 리오의 영향력에 용기를 얻어서 그녀는 국제조각협회가 개최하는 권위있는 존스톤 조각대회에 출품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세차례나 입상하기도 하였다. 존스톤 조각대회는 오늘날 추상 조각의 흐름 속에 무시되기 쉬운 인체에 대한 분석적 관찰의 중요성과 이에대한 아카데믹한 탐구를 장려하고 고취시키기위한 목적에서 오래 전에 창설된 조각대회였다. 그녀의 인체에 대한 관심과 뛰어난 감각은 이 대회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여러차례 입상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90년에 김태수는 뉴욕시에 있는 뉴욕 미술대학원에서 조각을 다시금 공부하게 된다. 인디애나 대학의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과 이론중심적 분위기와는 달리, 뉴욕 대학원은 조소의 구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교수들이나 학생들이 대부분 구상조각에 대한 고조된 관심과 열기로 가득찼다. 그녀는 여기에서 깊이있게 구상조각을 공부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 대학원의 교수인 하비 서트론(Harvey Cirtron)은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구상조각 그것도 인 체에 대한 표현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뉴욕 대학원의 구상조각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뉴욕 미술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하여서 새롭게 제기되는 흐름이었기도 하였다. 주지하듯 뉴욕미술은 오랫동안 비구상 조각이 주류를 이루 어 왔으며, 그에 대한 부정적 반응도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점 차 고조되어 왔다. 이들 새로운 세대들은 비구상 조각에 결여 된 내용적 요소를 극복하고 인간적 관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추세에서 인체는 다시금 조각에서 가장 중점적인 테마로 돌아오게 되고 구상조각은 다시금 미술계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추세로 돌아서게 된다. 따라서 뉴욕 미술계의 분위기는 여전히 추상조각이 주류를 이 루면서도 그 저변부로부터는 구상조각에 대한 새로운 물결이 다시금 형성되어 왔던 것이다. 많은 젊은 조각가들은 더이상 앞만 보고 걷고자 하기 보다는 한발짝 물러서서 뒤를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상 뉴욕화단에서 이와같은 저변부로부터의 새로운 움직임의 모태는 이미 1960년대의 세대들에게서부터 심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필립 펄슈타인, 잭 빈, 앤디 워 은 머지 않아 보다 독특하며 창조적 감성이 배어있는 작품들 홀 등은 추상미술이 미술계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새로운 구상미술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고해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선구적 안목에 의해 추상미술이 주류를 이루던 물결은 이후로 서서히 구상 미술로 되돌아 오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아직까지도 추상미술의 강력한 프로파겐다에 대응할 수 있는 미학이 제기되지 못한 상태이며, 과거 그리이스 조각이나 로댕, 부르델 류의 조각과 구분될 수 있는 새로운 구상조각의 경향이 뚜렷하게 제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이미 저변부로부터 구상조각의 열기는 상당히 확산 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김태수가 뉴욕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시기의 뉴욕미술은 바로 이와같은 분위기가 저변부에서 형성되고 있던 시기였다. 구상조각의 새로운 기류와 그녀 자신의 구상조각에 대한 강렬한 관심이 어우러져서 그녀는 뉴욕 미술대학원에서 구상조각의 기틀을 단단히 다지게 된다. 인체에 대한 보다 분석적 탐구를 강조하는 학교의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한국에서와는 다른 차원으로 인체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며 해부학적 시각으로 접근하게 한다. 인체에 대한 탐구는 예술적 감성에 의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과학자적 탐구 그 자체였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녀는 충실히 가르침을 받았고 결국 그녀는 졸업하면서 ‘수마 쿰 라우디’라는 최고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뉴욕 미술대학원 졸업 이후 김태수의 개인사정은 다시금 한국으로 오게끔 하므로써,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뉴욕 미술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기반을 다시금 훗날로 기약하게 된다. 한국 에 되돌아 와서 그녀는 또다른 감성을 찾고자 하였다. 다시금 그녀는 인체에 대한 한국적 감성과 미국에서의 분석적 시각을 조화시키기 위한 과정에 돌입해서 오랜 고뇌에 빠지게 된다. 미국과는 다른 역사와 정서를 갖고 있는 한국에서 다시금 적응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노력은 나름대로 과거와는 다른 형상을 창출하고자 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작품들이 서사적이라 한다면 한국에 와서 새롭게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들은 보다 시적이며 함축성을 띠고자 하고 있다. 최근 몇년간 그녀가 제작한 조각상들은 서서히 동 양적인 분위기와 특징들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이들은 서술 적이기 보다는 암시적이며 나름대로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대다수의 동양적 미가 그러하듯 그녀의 최근작들도 조금씩은 한국적 감성이 풍기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 새로운 작품들은 아직까지 그녀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숨겨진 세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냈다고까지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들 작품들은 아직도 보다 더 넓은 시야에서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인체에 대한 오랫동안의 성찰과 천부적 감성은 머지 않아 보다 독특하며 창조적 감성이 배어있는 작품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 생태 조각
    변종필 ㅣ미술평론 조각가 김태수는 오랜 시간 무궁한 지연의 파노라마를 유연하고 단순한 곡선과 곡면의 형(形)으로 환원한 후 색을 입히고 공간을 해석함으로써 거기에 태(㣍)를 입혀 왔다. 그렇게 자연이 드러내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장면을 형태로 만들어 자연이 존재하는 형식을 부어 주고 있다. 그 형식은 자연의 내면적 고유성이기도 하다. 작가가 3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 <Eco Flow : See, Look and Find>는 3층(See)-2층 (Look)-1층(Find)의 3개 층으로 나눈 전시 구성을 통해 자연의 내면적 고유성을 탐구한 그의 태도(관점)를 경험하게 유도한다. 3층은 높은 곳에 올랐을 때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작품이 놓였다. 바람이 어루만진 듯 리드미컬한 산의 형상에 생동적인 녹색을 더해 작가가 조용한 자연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2층은 역동적인 자연의 변화를 관객의 동선과 시선의 이동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작품을 배치했다. 사계절의 변화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처럼 지연의 흐름을 인지하도록 유도하며 생태의 순환을 우주의 신비처럼 표현했다. 벽에 걸린 옵티컬 (optical) 평면 조각(부조)과 천장에 매단 웨이브 형대의 설치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곡면의 흐름이 달라져 자연의 속살(내면)을 확대해서 은밀하게 들여다보는 듯하다. 1층은 작가가 자연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가장 감각적인 색과 형으로 조형화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단순화한 형에 입힌 원색이 강렬하다. 자연, 유희적으로 탐구하기 3층으로 나누어 전시한 작품들은 구성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는데도 협소한 공간으로 온전히 감상하기 어려워 아쉬웠다. 그나마 연출 방식의 아쉬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작품마다 붙인 제목이다. 열매 싹 풀과 같은 자연물을 형상화했지만, <아니마 아니무스> <무아적 몰입> <우주의 호흡> 등 감정의 순간이 느껴지는 제목에서 작가가 자연을 마주하며 경험한 순간적인 영감을 영원 또는 결정(結晶)의 의미로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마 아니무스>처럼 남성과 여성의 상호작용을 표현한 작품, <Anatta> <Tickle Tickling> <Ecstatic Flowing>이라는 각각 다른 명제를 지닌 작품들처럼 같아 보이는 사물, 혹은 자연물이라도 어느 것 하나 같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과 감흥에 의해 그 다름이 새롭게 인식되는 것을 알려 준다. 김태수의 작품세계는 모든 생물체가 ‘우주-대고-여명’이라는 기대한 자연 순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근원을 든다. 그리고 자연의 생태 흐름을 바라보고, 들여다보고,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찾아낸 자연의 내면적 고유성이 내재한 단순한 형과 태의 결정물이다. 이때 한 가지,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스테인리스 판재는 정밀한 기술적 과정(절단-용접-연마-도장)을 거치면서 작가의 손길이 감지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를수록 세련된 장식성을 띈다. 이 순간이 범속한 재현성을 극복한 이상적 예술 형태의 창조를 추구했던 작가 의도가 뚜렷해지는 지점이다. 기술(기계)적 개입마저 오직 아름다운 이상적 형태를 얻기 위한 필연의 선택이었다는 설득력을 갖게 한다. 이번 전시는 20년 넘는 원숙함이 만든 유희적 세련미의 특출함, 유려한 곡선과 곡면에 입힌 색이 이룬 하모니가 어떤 형태를 갖추었을 때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경험하게 한다. 무한한 자연 생태 중 자신에게 영감을 준 대상을 몇 개의 이상적 형과 태로 단순화하는 창작 활동은 순간순간 작가에게는 유희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색채 조각을 단순히 유희적 행위의 결과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의 내면적 고유성을 함유한 이상적 형과 태를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자연 모습을 감각적인 질료와 단순한 형태로 입체화한 김태수의 작품은 예쁘고 아름다운 그 자체로 기억할 만하다.
  • 광장의 색채와 광휘
    조은정 ㅣ 미술평론가,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현대조각은 그것이 바람, 공기와 같은 비물질일 때조차도 물질의 언어를 사용한다. 허상을 넘어선 공간에 존재하는 속성은 여전히 조각에서는 유효한 지점인 것 같다. 조각가 김태수가 모든 물질을 자신의 작품에 끌여들여 표현요소로 삼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다양성도 단계가 있는 법. 그는 레진, 용접, 스테인리스 스틸 등 손에 닿는 모든 재료를 작품화하고 구축한다. 그리하여 김태수의 조각은 기하와 구상, 자연적 재료와 새로운 물질 그리고 이성적 형태와 자연의 상기(想起)라는 상반되면서도 필연적인 관계성을 드러낸다. 새로운 형태와 색상은 추상이지만 그 근원은 자연 어딘가에서 발원한 구상적인 것이다. 칸칸이 대조적이며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추상성을 드러내는 그의 조각은 면적인 동시에 선적이며 또한 입체적이다. 다양한 차원의 종합과 같은 상황은 그동안 그가 추구해온 조각의 변화 안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공공미술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김태수의 조각 중에는 본인 것임에도 동명이인인 작가의 작품일 것이라 지레 짐작케 하는 경우들이 제법 있다. 십여 년의 간격을 두고 그의 작업이 급격히 추상화한 것이 사실이다. 그 추상화는 현상에 대한 감각적 번역을 거친 결과이다. 이를테면 일반적인 명사인 자연의 ‘소리’는 ‘흐름’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현상에서 본질로 이동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세계의 기반인 자연과 생명의 에너지 변환 구조를 파악한 것을 의미한다. 바람은 소리였다가 소리의 힘인 에너지의 본원적인 흐름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현상에서 원리로. 작품은 작가를 생의 비밀에 다가가게 하는 수련의 도구이자 한 세계의 창조주로서 가치를 드러내는 시금석이다. 관객은 그 도구를 통해 미를 즐기는 유목민이 될 수도, 스스로 길을 나서는 구도자가 될 수도, 선지자의 돌처럼 문득 눈에 들어온 형상 하나로 세계를 파악하게 되는 내부의 능력을 만날 수도 있다. 감염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이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자연 뿐만 아니라 삶의 장소로서의 자연이기도 하여 김태수의 작품 <Eco-Flow>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에너지로서 파악되는 자연의 흐름, 자연의 힘을 바꾸어 우리 삶에 이용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인간이 지켜야 할 규약괴도 같은 것이다. 그 ‘eco’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우리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김태수의 ‘eco’는 작품의 외형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다. 그의 독특한 색채는 어쩌면 에너지에 대한 이해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힘은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특한 색채감각 즉 빨강과 초록 같은 보색이 그의 작품에서는 스스럼 없이 부딪친다. 이 강렬한 만남-부딪침이 공기중에서 일어난다면 기압을 형성하고 공기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바닷물을 들쑤셔놓아 바위를 넘어 모래사장을 포말이 덮어버리게 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양의 힘을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직시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태양열 에너지라는 판으로 인식되는 존재였지 암각화에서처럼 소용돌이치고 패이고 구불거리는 어떤 것은 아니었다. 현대의 모든 이기(利器)를 이용한 김태수의 조각이 신화적 세계와 접속된다는 점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또한 강렬한 색의 대비는 양감과 질감에 집중하기 쉬운 조각에 회화적 속성을 부여한다. 강렬한 색채 덕분에 면을 자르고 용접한 부분부분이 평면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 단절은 공간에 선을 긋듯 색을 긋는다. 그어진 선들은 켜를 이루어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내고 그 뭉쳐진 공간에 위치한 조직을 우리는 조각이라 지칭한다. 너무나 또렷하고 확실한 그 단절의 선들은 컴퓨터로 계산되고 기계로 절삭된 것이다. 표면은 ‘도장(塗裝)’되었고 손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재료들도 쉽게 구조화 되어 공간에 놓이거나 걸리거나 바닥에 펼쳐졌다. 이즈음 드는 생각은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조각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패턴이 불규칙한 타원을 이루면서 커지는 것은 삼라만상의 조화,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어우르는 생태환경의 가늠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를 상징한다.” 겹겹이 쌓이거나 늘려진 선들이 존재하는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의 언어이다. 불규칙한 타원이 손을 통해 구조화되어 똑 떨어지는 지점을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데이터를 넣고, 컴퓨터로 계산된 곡면들은 언제나 명확히 특정 지점을 찾아 잘라내고 결합할 수 있게 한다. 평면의 지지체에서 용점을 통해 좌우로 펼쳐진 조형은 공간에 존재하는 볼륨으로 완성되지만, 애초의 시작은 면에서 그리고 선에서 시작된 것이다. 수직으로 서 양편으로 펼쳐진 조각의 구조는 씨방에서 싹이 자라나는 방식을 유추시키며 관찰자로 하여금 싹, 생명, 씨앗 그리고 어머니와 아기 같은 과거 그의 작품의 형태를 상기시킨다. 형태의 환기는 에너지의 환원을 유추하게 하는데 생명의 근원과 순환에 대한 이해를 도모시키기 때문이다. 완결되지 않은 소용돌이치는 형태들은 그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가장 완벽하다는 생명을 상기케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김태수의 조각은 모순투성이다. 에너지, 생명성을 비생명의 상징인 기하적 계산과 기계에 의해 구현하고 에너지의 원천, 즉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움직이는 속성을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강렬한 산업 도료로 가시화한다. 생명을 상징하는 기호와 원리를 비생명성의 언어인 철, 레진 등으로 조형한다. 삼각형, 원형, 파동형, 물론 직선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은 기계적인 언어들이다, 그런데 <Eco-Flow>라 하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에서 공기의 흐름을 드러내는 방법은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 혹은 모자가 날아가는 들판과 같은 표현으로도 가능하지만 기압골의 이동을 보여주는 기상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오히려 노랫말 속 날아가는 모자를 잡기 위해 손을 벋치기보다는 모니터 속 팽팽한 등고선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변화한다. 그 변화에 맞추기 위해 무한 달렸다. 점점 차오르는 숨이지만 그 쳇바퀴에서 누구도 내려올 수 없었다. 옆의 다른 쳇바퀴가 무한히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 혹은 어느 국가가 그 쳇바퀴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일상의 탈주가 아닌 달리기의 낙오자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감염증으로 모든 것이 멈춰진 시간이 찾아왔고 스윽 발을 벋어 땅에 딛는 일이 가능해졌을 때, 달리느라 못 본 것들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파란 하늘과 재채기를 불러오지 않는 공기 그리고 작은 공간에서 함께 부대끼며 요리를 하고 나누어 먹을 가족들 이외에도 무수한 것들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빛을 향한 속도인 줄 알았으나 자연의 파괴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전기와 수소와 태양이 에너지원임을 다시 인식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생명의 법칙에 대한 경외감에 몸을 떨게 된다. 그 떨림이야말로 세계를 있게 하는 진동과 같은 파장이 아니던가. 김태수의 유연한 곡선들은 파동이며 모든 생명의 진동을 가시화한 것이다. 데이터란 삭막하고 허구의 수리(數理)가 아니라 사실의 결과물을 수치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태수의 디지털적 처리를 통과한 이미지는 감각을 통해 인지한 생명의 흐름을 디지털로 고착시켜 가시화한 것이다. 그의 유연한 형상들은 새싹에서 발원한 에너지, 우주의 진동과 같은 파장으로서 이해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의 실재와 사이에 작가의 번역과 우리의 이해가 자리한다. 회화는 벽에 위치한다. 그 벽은 시선의 각도를 한정하고 관찰자의 수를 조정한다. 조각은 공간에 존재함으로써 스스로 열리고 관람자를 불러모은다.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사람의 일들이 벌어지듯 조각은 사람을 불러모으고 개개의 이해를 허락한다. 광장에 선 조각, 사람들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익숙함을 찾으려 한다. 전통적인 조각 개념에서 현저히 다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닌 지지대와 양날게 이외에 그의 작품이 주는 익숙함은 조각에서는 다소 이색적인 바로 그 색채이다. 디지털화한 기기 속 색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색채 감각이 그의 작업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내뱉는다. <eco-flow>는 그렇게 평면과 입체, 색채와 빛 사이에서 현재 지금의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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